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나다 노부시게 (문단 편집) === [[세키가하라 전투]] === 노부시게의 나이 30세가 되어갈 즈음에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행보를 비꼬며 도발하였으므로 큰 싸움이 날 조짐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 이시다 미츠나리와 손잡은 [[나오에 카네츠구]]의 계략으로, 이에야스가 카게카츠를 치러 동쪽으로 향한 사이에 미츠나리가 군세를 일으켜 이에야스를 제압한다는 계책이었지만, 이에야스는 동쪽으로 가는 척 하다가 군세를 일제히 돌려 [[다테 마사무네]]와 모가미 요시아키에게 우에스기 집안을 상대하도록 하고 자신은 세키가하라로 향했다. 이 때, 마사유키는 큰 평가를 받고 있어서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양측의 가담 제의를 받는데, 노부시게는 서군(도요토미) 측의 [[오타니 요시츠구]]의 사위였고 노부유키는 동군 측의 [[혼다 타다카츠]]의 사위였으므로 형제간의 의견이 달랐고, 마사유키는 노부유키만을 동군으로 보내고 자신은 서군에 가담한다. 도쿠가와 측 본군은 차남[* 정확히는 삼남이나, 장남을 일찍 자결시켜서 차남으로 친다.]이자 후에 2대 쇼군이 되는 히데타다가 이끌고 후에 세키가하라에 도착하기로 했는데, 히데타다는 가는 길목에 서군인 마사유키의 성이 있었으므로 대군으로 공격하려 했다. 히데타다의 군대는 3만 8천. 반면 마사유키의 군대는 고작 2천여에 불과했던 터라 히데타다는 "어차피 공격하면 내가 유리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마사유키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했다. 마사유키가 항복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마사유키는 성문을 열고 항복할테니 성을 깨끗히 청소할때까지 기다려 달라라고 말했다. 히데타다는 마사유키가 순순히 항복하는것에 기뻐했지만... 그것은 마사유키가 농성전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벌기'''일 뿐이었다. 결국 이틀을 기다리다 히데타다는 성을 총공격했으나 노부시게가 성으로 통하는 좁은 길목에 버티고 무려 '''1주일'''을 버텼다.[* 아무리 수성에 유리한 길목을 점하고 있었다해도 10배는 넘는 적군을 1주일이나 붙들어둔 전과는 쉽게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비가 장판교에서 겨우 수 시간을 벌었지만 활약상을 꼽을 때 꼭 나오는 게 괜한 것이 아니다.] 결국 히데타다는 피해만 왕창 입고 퇴각, 전장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도 못하는 실패를 저지르게 된다. 이렇듯 마사유키가 승리를 위한 포석을 깔아주었지만 세키가하라는 시궁창. 서군은 쫄딱 패하고 미츠나리는 잡혀 죽었다. 서군 측 영주들도 전봉, 혹은 감봉, 심하면 영지를 아예 빼앗기는 조치를 받는데, 원래 가진 것도 없었던 데다 죄질도 나쁘고 실력도 뛰어난 마사유키, 노부시게 부자는 사형에 처해질 예정이었지만 형인 노부유키와 사돈인 [[혼다 타다카츠]]의 탄원(사돈은 잘 두고 볼 일이다.)으로 [[키이]]국의 구도산(현재는 [[와카야마현]]의 구도야마 정) 지역으로 옮겨져 유폐생활을 하게 된다.[* 원래 고야산(高野山)이었으나 노부시게가 정실 치쿠린인을 동반하였기 때문에, 금녀의 구역인 고야산에서 구도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이 사나다 부자 때문에 지참(전장에 늦게 도착하는 일)했기 때문에 이를 바득바득 갈며 사형을 요구했다.[* 근대전에서도 그렇지만 전장에서 부대 하나가 늦으면 전선이 형성되지 못하고 아군이 우르르 무너질 수가 있기 때문에 지참은 엄벌로 다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할복을 명령받는 일조차 있었고 운이 좋아도 개역(가문의 재산을 몽땅 빼앗고 내쫓는 것) 처분이기 때문에 히데타다가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이에야스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히데타다는 이때 살아남았으나 그래도 분을 참지 못한 이에야스에 의해서 후계자지명을 받지 못할 뻔했다.] 그러나 망설이던 이에야스에게 혼다 타다카츠가 "어르신 만약 그러시면 저와 일전을 나누셔야 될 겁니다."라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나다 부자를 살려두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폐 시절 노부유키는 골칫거리인 아버지와 동생에게 생활비를 보내주며 돌보았다고 하는데, 항상 까탈스럽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마사유키와 달리 노부시게는 얌전하고 미안해했다고 한다.이 시절 남긴 편지들을 보면, 아버지 마사유키는 아들에게 빚이 많으니 돈 좀 빨리 보내달라고 재촉하는 내용이 있다. 사나다 집안은 그래도 한 때는 다이묘라서 서민처럼 생활할 수는 없었고, 노부시게만으로도 정실과 측실의 자식이 10명이었다. 게다가, 따라온 가신들과 그 식구 약 50여 명까지 챙겨야 해서 항상 빚에 시달렸다. 그래서 구도산의 주민들에게서도 원조를 받았다고 한다. 형인 노부유키의 배려로, 유폐라고는 해도 구도산에서의 생활은 상당히 자유로웠던 편이었으며, 이미 그들이 구도산에 오기 전부터 주변 주민들에게도 '높으신 분들이 오시니 잘 모셔라'라고 통보될 정도로 배려를 받았다고 한다. 웬만한 여행이나 외출은 물론이고 사냥 역시 허락될 정도였다. 다만 금전적 형편은 안 좋아서, 소주를 사 마실 돈도 없었는지, 지인에게 "이 술독에 [[소주]][* 이 시기의 소주는 현대의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증류식 소주라 [[위스키]]만큼이나 비싼 고급 술이기는 하지만.] 좀 채워서 보내달라. 보답으로 [[유카타]]용의 천을 한 포 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병으로 몸이 아프고, 이제는 이빨도 빠지고 수염에는 검은 것이 거의 없다"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편지를 분석하면, 몸은 작은 체구였던 것 같다. 형의 편지에 의하면, 평소 성격은 말수가 없고 인내심이 많아서 여간해선 화를 내지 않는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출전 : [[역사비화 히스토리아]] 歴史秘話ヒストリア 真田幸村 ザ・ラスト戦国ヒーロー ~伝説に秘められた誇り~ [[http://www.pandora.tv/view/fx_keaton/35969284/]], 「真田一族 戦国最強の絆~真田昌幸・信之・幸村」[[http://newskei.com/?p=3619]].] 이 시절, 만든 것이 사나다 끈(真田紐)으로, 가신들이 행상을 하며 사나다 끈을 팔고 다니면서 생활비도 벌고 전국의 정세도 살폈다고 한다. [[1611년]]에 마사유키가 병으로 사망. 부친의 죽음으로 16명 있던 측근의 가신들은 고향[* 이들은 모두 형인 [[사나다 노부유키|노부유키]]의 아래로 들어갔다.]으로 돌아가고 노부시게 곁에는 2~3인만 남게되었다. 다음해에 노부시게는 출가하여 고하쿠(好白)라는 법명을 얻는다.[* 기무라 츠나모리(木村綱守)나 가와라 사쿄(河原左京)등에게 보낸 서장에 「真好白」「真好白信繁」등의 서명이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